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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든다는 것

기자명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 Ⓒ 문화재청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 Ⓒ 문화재청

경주 옥산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아홉 곳 중 하나다. 최근 그 옥산서원의 중층 문루(門樓) ‘무변루(無邊樓)’가 보물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3년 전 일이 떠올랐다.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회의장. 갓 쓰고 도포 차려입은 유사(有司) 열일곱 분이 뉴스의 초점이 됐다.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순간, 참석자들 눈길이 한국에서 온 유림(儒林) 대표에게 쏠렸다. 옷차림이 특이하기도 했지만 절제된 태도가 더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자국의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된 대부분의 나라 대표단이 국기를 펴들고 떠들썩하게 자축하는 모습을 보인데 반해 한국 유림들은 공수(拱手), 배흥(拜興), 평신(平身)의 순서대로 감사의 인사를 한 뒤 공기 속으로 스며들 듯 조용히 회의장을 떠났다. 서원이 지켜온 정신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세계인에게 각인시킨 셈이다.

 무변루는 북송 유학자 주돈이가 쓴 글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따왔다. 경계를 없애는 곳이라는 뜻이다. 서원 밖 계곡과 산을 누각으로 끌어들여 인간계와 자연계의 가름을 허물고 서로 스며들게 한다는 취지가 담겼다. 조선시대 실천하는 지식인, 선비를 키워내던 서원의 정신이 새삼 느껍다.

 

호림박물관 ‘상감’전에 나온 ‘청자 상감 인물문 편호’. Ⓒ 정재숙
호림박물관 ‘상감’전에 나온 ‘청자 상감 인물문 편호’. Ⓒ 정재숙

상감-이질적인 것들의 어우러짐 (7.26~12.30 서울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로에베 재단 2022 공예상 (7.1~31 서울공예박물관)

 상감(象嵌)은 무변루와 일맥상통하는 전통 공예 기법이다. 이질적인 소재들이 서로 어우러져 새로운 미감을 일구는 과정이 흥미롭다. 우리나라 옛 공예의 맛과 멋이 응축된 결정체라 할까.

 7월 한 달 미술애호가들 발걸음으로 서울공예박물관 문턱을 닳게 한 ‘로에베 재단 2022 공예상’ 현장 또한 이 ‘상감’ 기법의 재발견을 위한 자리처럼 보였다. 스페인 브랜드 ‘로에베(LOEWE)’가 현대 장인 정신을 북돋으려 경선 형식으로 기획한 전시는 한국의 공예가가 최종 우승자가 됨으로써 우리 전통 공예에 영광을 주었다.

 2022 로에베 공예상을 거머쥔 정다혜씨는 조선시대 남성 모자인 망건을 만들 때 쓰던 짜임 기법과 무늬를 활용해 말총 공예와 현대 공예를 어우러지게 한 바구니를 내놨다. ‘전통을 되살려 현대를 풍요롭게 한다’는 상의 취지를 정 작가는 ‘성실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받들었다. 까다롭고 희귀한 재료인 말총을 붙들고 시공을 넘나든 ‘성실의 시간’은 그 앞에 선 관람객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지게 만들었다.  

 

2022 로에베 공예상 수상작인 정다혜 작가의 ‘성실의 시간’. Ⓒ 정재숙
2022 로에베 공예상 수상작인 정다혜 작가의 ‘성실의 시간’. Ⓒ 정재숙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조나단 앤더슨은 2013년 이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상감기법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상감기법은 정말 마법 같은 기술이다. 이야기가 담겨 있고, 장식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컬러를 갖고 있어 계속 눈길을 끈다.”(중앙SUNDAY 7월 2~3일 16쪽)

 상감기법은 오늘의 단어로 말하면 혁신적인 창작방식이다. 도자기에서는 바탕색이 다른 붉은 흙과 흰 흙이, 금속공예에서는 금과 은이, 목공예에서는 자개와 거북껍질 등이 어우러져 전혀 다른 경지의 예술품을 탄생시켰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의 전시는 재료에서 한걸음 나아가 ‘인간과 기계’, ‘현실과 이상’ 같은 경계를 넘나드는 것들의 어우러짐까지 상감기법으로 밀어붙였다.

 

박수동 작 ‘이규보의 전당포’. Ⓒ 정재숙
박수동 작 ‘이규보의 전당포’. Ⓒ 정재숙

박수동: 한시와 만화의 만남 (8.3~30 서울 아트파크)

 무변의 길은 접점이 무궁무진하다. 만화 연작 ‘고인돌’로 이름난 원로 만화가 박수동씨는 조선 한시(漢詩)를 만화에 접붙인 한만시(漢漫詩)를 내놨다. 작가의 변은 이렇다.

 “마감시간에 40년을 쫓기다 자유를 찾아 충청도 산골로 낙향했다. 심심해서 한시를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한시+만화=한만시라 이름 짓고 창피해서 화첩에 몰래 그렸다. 한자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한자를 만들기도 하고 쓰지 않고 그렸다.”

 그는 중국에는 도연명, 이백, 두보 등 술꾼 시인들의 음주시가 많아 만화로 그리기 좋은데 한국에는 왜 그런 시인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규보(1168~1241)의 음주시(飮酒詩)를 발견했다. 이규보는 시, 술, 거문고를 즐겨 스스로를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칭했던 당대의 명문장가다. 이 양반이 진짜 고려시대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시의 소재와 감각이 21세기를 뺨쳐서 놀랐다고 했다. 점잖고 무게 잡는 한시와는 거리가 먼 발상의 전환과 여유를 보면서 그는 한만시의 경계를 가뿐히 넘었다.

 한만시의 또 다른 미덕과 비결은 스며드는 필선의 부드러움이다. 대학생 시절에 할머니가 그리시던 부적(符籍) 일을 돕던 경험이 큰 힘이 됐다. 그때 할머니는 속기(俗氣)를 버리고, 힘을 빼고, 두루뭉술하게 그리라고 가르치셨단다.

 박수동 선생 손에서 되살아난 이규보의 한만시는 800년 세월을 시차 없이 뛰어넘어 짙은 술 냄새와 문자 향기를 뿜어낸다. 한자도 춤추게 만드는 필선의 매력이 가히 쾌하다.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스며들기!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잡아낸 경이로운 우주사진 또한 말없이 그 경지로 반짝이고 있었으니.   

 

정재숙

문화재청장을 지낸 언론인이다. 고려대에서 교육학과 철학,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문화유산을 비롯한 문화계 주요 분야에서 취재와 함께 정책 자문도 하고 있다. 한겨레에서 사회부, 문화부 기자 등을 지내고 중앙일보에서 문화에디터와 논설위원, 문화전문기자 등을 역임했다.  언론 활동 중에도 국립현대무용단 이사, 문화재청 심의위원 등을 지낸 뒤 2018년 현역 기자로는 처음 문화재청장(10대)에 임명됐다. 현재  <IPKU> 편집위원과 플라톤아카데미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나를 흔든 시 한 줄』, 『전몽각 Jeon Mong Gag』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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